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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주의 vs 개인주의 - 정중규

정중규 2010. 2. 8. 01:52

집단주의 vs 개인주의

 

- 교회, 자유와 해방의 하느님 백성 그 꿈을 다시 지녀야

 

 

2010년 02월 08일 (월) 정중규 mugeoul@hanmail.net

 

 

기원전 2천 년경부터 시작된 야훼(유대·그리스도교) 역사가 인류사에서 지니는 의미는 권력·전제·맘몬·정복·억압·소외 등등으로 표현되는 집단주의(한마디로 惡)로 치닫던 인류의 흐름에 반(反)하여 자유·해방·일치·공동체·연대·하느님 등등으로 표현되는 개인주의(한마디로 善)의 기치를 내세우며 새 시대를 열었다는 점이다. 그 선구적이고 전위적인 성격은 야훼 역사의 도구인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4천 년사에 그 자신 오히려 집단주의적 병폐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사에 지대하고도 귀중한 위치를 점하게 만든다.

 

 

   
▲ 'The Way - a renovated vision of the Jesuits' - Paulo Porcella

 

물론 이것은 복귀현상이다. 고대 문명 이전 인류는 또한 원시적 형태로나마 개인주의를 누렸었기 때문이다. 이를 성경에선 에덴의 상태라고도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앞날에 완성될 그 상태이기도 하다. 참으로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 기원전 8천 년부터 고대문명이 시작되면서 인류는 문명화 속도와 비례하여 집단주의에 침식당하게 된다. 그 극단이 고대 이집트 왕국, 바빌론 제국, 진(秦)제국, 현대 파시즘 등등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주의도 4천 년 전부터 야훼 역사와 더불어 마치 옛 꿈을 다시금 되찾듯 아주 힘들지만 제 영역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그 극단이 이스라엘 가나안부족연맹, 그리스도교 초대공동체, 붓다이즘, 민주주의 등등이다. 이러한 힘겨룸 속에서 개인주의는 역사발전의 도상에서 그 도덕적 정당성에 힘입어 집단주의를 서서히 제압하고 있다.

 

야훼 역사의 또 다른 특성은 민본주의의 권력화이다. 온 세계가 고대왕정주의의 가공할 질곡에 꼼짝 못하고 있었던 그 시대에, 이스라엘 공동체만큼은 민본주의가 그 핵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사야·예레미야·아모스·미카 같은 예언서들과 열왕기 같은 글들을 보라. 지극히 반체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이만한 기록물들이 지배계층에 의해 보존되어왔음은 가히 놀랄만한 일이다. 현대 민주주의국가에서도 집권세력을 이처럼 혹독하게 비판하는 글들은 바로 금서목록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성왕 다윗은 물론이고 아합 같은 사악한 왕조차도 예언자의 충고에 귀 기울이니, 이스라엘 공동체 지배계층의 민중성을 반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사회에서의 ‘영향력 있는 집단’에 왕을 위시한 정치집단뿐 아니라 제사관집단·예언자집단 등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마치 헤롯 왕이 민중이 두려워 세례자 요한을 무시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 지배계층이 선해서라기 보다는 사회전체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갔던 민중주도의 사회였던 탓이다. 아니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 민중성은 하느님 중심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니, 민본이 신본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The Little Children Being Brought to Jesus Completed' -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예수 그리스도 메시지의 가치전복적 혁명성

그런 분위기에서 예수 혁명이 펼쳐졌던 것이다. 되돌려 놓는다(revolution)는 뜻을 지닌 혁명이란 단어 의미 그대로 그분은 오도되고 왜곡된 상황에 처해 있는 민중현실을 원래의 상태로 올바로 되돌려 놓으려 하셨다.

 

율법을 앞서는 인간의 소중함을, 율법의 참된 완성은 민본적인 사랑 실천에 있음을, 곧 민본은 신본과 통함을, 그러한 온전한 사랑을 통해 소외지역을 없이함으로써 비로소 하느님 백성의 참된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그리하여 그분 자신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는 제자파견사에서 보듯 그 시대의 죄인들을 찾아 그토록 다니셨던 것이다. 그분의 선교 자체가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다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분 메시지의 가치전복적 혁명성이다. 그것이 복음서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참새도 독수리도 같게 보시고,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될 수 있는, 말째가 첫째로 될 수 있는, 작은 겨자씨 하나가 가장 큰 나무로 변할 수 있는, 들꽃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영화보다 나을 수 있는, 밀 알 하나가 썩어 무한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 회개하는 것이 하늘나라에선 더 큰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웃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온 우주를 사랑의 텃밭으로 만들 수 있는, 그분의 희생으로 온 인류가 구원될 수 있는, 그분을 믿는 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그분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우리의 아픔과 슬픔이 그분의 아픔과 슬픔이 될 수 있는,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그분 말씀은 일 점 일 획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그렇게 그분 메시지의 모든 것은 다 그러하다. 이것을 온전히 이해할 때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그리스도의 제자인 교회에게도 그 공동체성은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가치의 가치’여야 할 것이다. 교회가 소수자를 위해 자신을 투신하는 것은 ‘소수의 그들’만을 위하는 것이 아닌 교회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것이 되며, 교회의 보편성은 ‘다수의 의한 다수를 위한 다수의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선 들판에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있는 그런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교회다운 마음씀은 바로 그런 것이요 그럴 때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되찾고 품에 안고 돌아와 기뻐할 수 있는 교회다운 기쁨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공동체성을 교회가 잃어버렸을 때 더 나아가 그를 방조 내지 조장할 때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존재가치가 사라지고 또한 그런 까닭에 근본적인 죄악(원죄)을 저지르는 꼴이 된다.

견고한 집단주의, 견고한 계급주의, 견고한 율법주의에 함몰된 교회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수천 년에 걸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힘겨룸 텃밭 그 한 가운데에서 하늘나라 깃발 아래로 모여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하지만 지난 세월 이 싸움의 최전방에 서야 할 교회가 안타깝게도 그분에 대적하듯이 오히려 반대편 집단주의 깃발 아래 서 있을 때가 많았다.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성과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예언자의 외침은 늘 빈들의 메아리 되고, 견고한 집단주의, 견고한 계급주의, 견고한 율법주의에 함몰된 교회는 고대 왕정체제보다 더한 절대권력의 흰개미탑을 끝없이 쌓고 또 쌓아올렸었다. 불행하지만 지금도 변함없는 현실이다.

 

 

   
'Colossus' - Francisco Goya

 

사실 대단하다. 거의 우주목(宇宙木)에 비겨도 될 만큼 인류역사 속의 교회라는 기둥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것은 ‘2천년 역사’나 ‘종말 때까지’라는 시간적 의미나 세계 최대 집단이라는 공간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루돌프 옷토가 말한 누멘(Numen)적 요소의 현현적 실체로서 마치 잃어버린 신화시대의 거인이 다시 나타난 것만 같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거인의 몸뚱이가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떠날 때 신비체의 속성은 사라지고 통제불능의 난폭함만 거셀 따름이었다. 세상을 향해 보다 열린 마음의 성숙되고 겸손한 사랑의 자세로 접근하지 못해 저질렀던 지난 2천년의 갖가지 아픈 사례들. 동방과 서방교회의 분열, 정통수호라는 미명 하에 저질러진 패권싸움 같았던 숱한 이단논쟁들, 정복주의 선교에 의해 자행되었던 대학살들, 그야말로 모든 것에 자비롭고 온전히 열려 계셨던 그분의 삶과 고결한 인격 앞에 제자라고 내세우기조차 부끄러운 짓들이었다.

 

그분 머리에 고여 있는 자비의 기름이 교회의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언제나 온 몸을 젖게 해야 할 것이다. “내 영은 죽이는 영이 아니라 살리는 영이다.”(루카 9,55)라고 하셨던 그분의 모성적 자비로움만이 모든 생명을 살리고 온 세상을 구원에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그러해야 한다.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하고 꿈을 지녀야 한다. 4천 년 전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된 야훼 역사, 자유와 해방의 하느님 백성 그 꿈을 교회 가슴에 온전히 지니고서 그 꿈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함으로써 그 꿈의 진정성을 세상에다 증거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모두를 살리는 마음 그리스도의 손길은 모두를 살리는 손길

수난을 앞둔 전날 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禮)를 행하라.” 그것은 세상을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는 사랑 그 예(例)를 말한다. 그처럼 무엇인가를 먹고 마실 때마다 동시에 스스로를 세상에다 ‘먹고 마실 수 있는 존재’로 내어 주라고. 그렇게 해야 모두는 함께 살 것이라고. 과연 그러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모두는 집단주의 문화에 대항하는 생명문화의 첨병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삼키려 드는 물질주의의 억센 가라지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 영성의 밀을 심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모두를 살리는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손길은 모두를 살리는 손길이요, 그리스도의 삶은 모두를 살리는 삶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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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다음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