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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잘 나갈 때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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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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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만의 춘삼월 꽃샘 폭설로 창 밖 세상이 백설천지가 되었던 아침, 봄꽃이 아닌 눈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조심스레 가니 벌써 갖가지 생명 흔적들이 눈밭 위에 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의 발자국보단 까치들과 고양이들의 조심스런 뜀박질 흔적들, 가랑잎과 잔가지와 돌멩이들의 눈 먹은 흔적들, 스쳐지나간 칼바람의 흔적들, 내 몸을 싣고 가는 전동휠체어의 둔중한 바퀴자국 등을 보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나의 이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될지니(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라는 서산대사의 글이 유난히 가슴에 새겨지는 아침 정경이다.
솔직히 나는 하느님이 어디에 계신지 모른다. 하늘에 계신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셋째 하늘(2코린 12,2)에 계신지, 아니면 내 안에 계신지, 우리 안에 계신지, 확언할 수 없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지극히 주관적일뿐이니 말 그대로 설왕설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앙이 신비인 연유이다.
하지만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는 확언해 줄 수 없을지는 몰라도 이 땅에 오신 그분께서 어디에 계셨는지는 알 수 있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 그 자취를 통해 파악된다. 흔적이 존재를 알려주는 것은 분명한 진리이다.
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발자국은 어떤 곳에 남겨져 있나? 복음서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세상의 죄를 안고 사는 이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기죽이고 삼키려드는 세상의 권력으로부터 그들을 옹호하시는 그분의 격정적인 장면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이 가장 육적으로 될 때 하느님은 가장 영적으로 대하신다. 가장 불의한 시대에 가장 정의로운 예언자를 보내신다. 그들 모두가 세상의 죄에 짓눌려 있던 그 시대가 그러했다. 그분의 육화 강생 사건은 그런 불의한 상황을 단칼에 쪼갠 하늘로부터 내려온 번갯불이었다.
그분은 마치 예언자 엘리사가 수넴 여자의 죽은 아들을 살리려고 할 때처럼(2열왕 4,34), 그분의 입술과 손발 가슴을 그들의 입술과 손발 가슴에 포개고서, 그분의 숨결을 죽어가는 그들의 몸속에 불어넣으면서까지 그들을 살려내려 무진 애를 쓰셨다.
그분의 구업사업은 오로지 그들 모두를 세상의 죄로부터 무조건 무죄방면시키는 것이었고, 그들의 비통함이 그분의 비통함이 되고 그분의 행복이 그들의 행복이 되어 한 몸이 되어 뒹굴면서, 그분에 의해 선포된 해방과 자유의 희년은 그분에 의해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들의 모든 삶에 그들과 똑 같이 되시어 마치 DNA 두 가닥 나선처럼 하나로 밀착되어 그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신음하고 통곡하시며 하늘나라의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셨던 그분은 파라클레토 임마누엘이셨다.
그로부터 그들에게선 언제나 그분의 체취가 물씬 난다. 그들에게선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흔적이, 땀이 흥건한 하느님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발견된다. 그들이야말로 그분 전승의 진정한 담지자로, 교회의 심장이요 핵심이며 그분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것을 교회가 불편한 진실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 불편한 진실로 여겨질지라도 외면치 말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 모두가 그분에게서처럼 교회를 통해서도 무죄방면의 해방과 자유의 희년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그분께서 그들과 한 몸으로 뒹굴며 지니셨던 그 체취를 교회도 지녀야 한다. 교회의 길이 하느님의 길인 동시에 사람의 길인 까닭도 그 길에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땀내가 흥건하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교회가 다시 걸어가야 한다. 그분의 땀으로 온 몸이 흥건히 젖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 모든 것을 생산적 가치로 판단하는 냉정한 자본주의 시장, 사회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가 가속화하는 이 사회에서 그것은 교회가 상업주의의 포기와 자본주의적 대세로부터의 탈피를 말한다. 비인간적이고 몰가치적인 사회체제가 던져주는 떡밥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쉽사리 덥석덥석 물어선 안 될 것이다.
특히 한국천주교회는 2백년을 지나 3세기로 가는 중요한 분기점에 서 있다. 동서고금 어느 종교든 3세기를 넘어서면 대체적으로 제도권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외형적인 안정기로 접어드는 그만큼 창립기의 순수한 열정은 상실하게 된다. 이 과도기를 건강하게 잘 넘기면 보다 성숙된 영성의 창조적 부흥기를 다시 맞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외화내빈의 위기에 처한 채 생명력을 잃고서 쇠퇴하고 만다. 그만큼 중요한 순간이다. 양적 성장을 질적 성숙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교회 주체들의 보다 개방적이고 도전적인 자세와 자기성찰의 예언적 영성이 요구된다.
‘잘 나갈 때 조심하라.’ ‘호황일 때 불황을 대비하라.’는 경제원리는 여기서도 합당하다. 풍요의 축복을 탕진하지 않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이 교회에서는 자기쇄신이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회쇄신의 방향은 언제나 ‘신앙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분의 발자취가 숨 쉬고 있는 그곳, 그분의 땀내 나는 체취가 남겨져 있는 그곳에 가 머물며 그분의 체취가 몸에 배어들게 해야 할 것이다. 마치 꿀벌이 꽃가루를 몸에 묻혀 퍼트리듯이 그분의 체취,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몸에 묻혀 세상을 그리스도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이 복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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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 다음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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