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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오면 - 정중규

정중규 2010. 1. 30. 22:53

아침이 오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지난 부활절 저녁 미사 때에 왠지 이 말씀이 그렇게도 와 닿아 가슴에 자꾸만 눈물이 가득 고여 옴을 느꼈다. 그렇다. 그분은 다른 무엇보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셨다. 오직 남을 위해서만 사셨던 그분의 삶 그 무아의 품으로 세상의 죄를 온통 녹여버리신 분이셨다. 예언자 이사야의 표현대로 그분은 말없이 털 깎이는 어린 양과 같은 분, 깨끗하고도 티 없이 거룩한 참된 제물인 그분 앞에 세상의 죄는 헛되고도 초라하게 되어 버렸다.

 

결국 파스카의 신비는 침묵의 신비요, 침묵은 세상의 죄를 속죄하는 행위이다. 하여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그분의 길을 우리가 가려면 침묵의 신비에 깊이 맛 들여야 한다. 세상이 죄란 무엇인가. 모두가 하나같이 악머구리로 소란을 떨며 저질러 놓은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은 죄의 고리이다. 거기에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같은 또 하나의 소란을 더 보탤 것인가? 키르케고르는 ‘침묵하라! 오직 침묵하라!’고 외친다. 죄의 고리 그 매듭은 침묵의 힘 앞에선 뜻밖에도 힘을 잃고 쉬 풀려버리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진정 새롭게 되려면 자기 삶 속에 침묵의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 말로 다할 수 없이 깊이 탄식하시며 간구해 주시는 그분께서 함께 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를 참으로 살리시려는 그분은 누구신가. 내 십자가를 보시면 ‘도저히 그냥 있지 못하겠구나!’ 하면서 내 곁으로 달려와 불길 같이 뜨거운 사랑과 안타까움에 몸부림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힌 내 몸뚱이 위에 포개어 겹으로 그분도 같이 못 박히시고, 그도 못해 아예 내 고통의 한 이불 속에 비좁음을 무릅쓰고 파고 들어와 살을 부대끼며 신음하고 탄식하시는 하느님, 내 모습으로 나날이 성육신하는 임마누엘 그분이시다.

 

우리의 삶은 그분이 거두시는 까닭에 어느 것 하나 결코 헛될 수가 없다. 농부가 곡식을 수확하듯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품에 영생으로 안으시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그분의 손길에 의해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이 씻겨지고, 그분만이 줄 수 있는 참된 평화가 아픔의 우리 가슴마다에 가득 솟치고, 가시 찔린 그분을 바라보면서 우리 몸의 온갖 상처들이 빛으로 변형을 입는 그날 부활의 아침은 환히 밝아 오리라.

 

생명이 생명답게 되어 부활하는 새아침의 생명력도 기나긴 침묵의 여정이었던 휴식의 지난밤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 봄, 생명의 몸짓들이 열병처럼 모든 걸 들쑤시며 심장에 산 피를 수혈해 주고, 겨우내 잠들었던 우리의 혼을 새로운 춤과 노래로 다시 깨우는 이 축제의 시기를 우리 모두 불멸의 생명혼으로 보내도록 하자. 아침이 밝아온다. 밤새 안녕, 친구들?

 

 

● 천주교 부산교구 지체장애인선교회 회보 모둠사랑 제30호 199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