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뽑히는 아픔
너무 고요해 비둘기조차 졸음에 빠져 있는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마을에 따스한 햇살이 듬뿍 내리고 있다. 파란 하늘 흰 구름 아래 재잘대며 뛰노는 행복한 아이들. 밭에도 산에도 푸른 기운 감돌아, 괭이로 땅 파고 호미로 흙 일구며 파종하는 노파의 손들엔 굵은 주름이 뛴다. 향그런 봄의 품안에서 만물은 쑥쑥 자라나고 있다. 이렇듯 계절은 완연한 봄이건만 IMF 한파를 맞아 가뜩이나 고달픈 우리 장애인들의 삶은 벌써 수많은 이들이 죽음으로 내몰렸을 만큼 암담하기만 하다.
사실 사회에서 장애인이 겪는 아픔은 그 어디에도 발붙일 데 없어 비롯되는 ‘뿌리 뽑히는 아픔’이다. 누가 장애인의 아픔을 다 알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실업자가 겪는 ‘퇴출’ 이상의 아픔이다. 그런데도 장애인을 위한 취업·생계대책은 그 흔한 ‘대책’으로조차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자세야말로 이 사회의 천박성을 고착시키는 원인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복지대상자는 더욱 늘어나기에 장애인을 비롯한 취약계층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두어야 하고, 사회복지에 대한 투자도 더 늘려야 한다. 무엇보다 장애란 사회환경과 관련되는 상대적 개념이건만, 환경적 장애를 무수히 지니고 있어 장애인을 만들 수밖에 없는 이 사회가 거꾸로 한 인간을 장애인으로 ‘낙인’ 찍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선진사회처럼 제도적으로 인간다운 삶이 뒷받침 되고 무엇보다 편의시설이 온전히 갖춰져 있다면 장애인도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다 신학적 관점에서 장애란 불완전한 인간실존의 표상이다. ‘장애’ 앞에서 우리가 겸손해져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기에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배려는 단순한 베풂만이 아니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한다(1코린 12,26)는 말 그대로 공동선의 차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애 자체가 하나의 ‘개성’이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장애 역시 하나의 ‘다름’일 따름이다. 획일화된 잣대로 장애를 ‘모자람’으로 쉬 판단하는 차별의식과 편견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고유한 ‘다름’의 삶으로 받아들여 주는 깨어 있는 인식이 모두에게 요구된다. 이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정보화시대를 맞아 우리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지녀야 할 삶의 자세이다.
교회 역시 성전이 대개 2층 이상에 마련되어 있어 장애인을 비롯한 노약자에겐 아예 ‘그림의 떡’이요, 미사 참례가 천당 가는 것(?)보다 더 힘든 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휠체어경사로나 승강기 설치와 같은 편의시설의 확보는 꼭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못 보고 못 듣는 이들을 위한 점자번역 성경이나 자막 처리 같은 전례적 배려 역시 시급하기만 하다. 이것이야말로 공생활에서 만난 무수한 장애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며 참사랑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삶을 다시금 되살리는 작업이다. 교회는 장애인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영육간에 지지해주어 그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김없이 장애인의 달은 이 봄날에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어제보다 못한 오늘이, 오늘보다 못한 내일이 그려질 따름이다. 장애인 그들 하나하나의 가슴마다에 봄날의 기운이 완연히 되살아날 그날을 진정으로 기대해보는 장애인의 달 오늘이다.
● 천주교 부산교구 주보 가톨릭부산 제1441호 1999/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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