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가 이상향이다
이상향에 대한 꿈과 희망을 인류의 가슴 속에서 지워버려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어린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 민중이 인류와 역사의 ‘씨’이라고 한다면 어린아이는 그 씨알의 씨알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는 가장 밝게, 티 없이 건강하게, 따스한 환경에서 자라나도록 해야 한다. 즉 어린 시절이 인간의 생애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인류의 미래를 키우는 것이 된다.
사실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쏟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인간적인 노력만으론 성취될 수도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본 자만이 사랑을 줄 수 있다고, 자라나는 우리의 어린아이에게 참다운 애정을 쏟고 또 그런 삶을 가르쳐 보라. 인류문명사 동안 그토록 온갖 희생을 다하며 끝없이 쏟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실현 가능성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유토피아는 단 1세기도 가기 전에 자연적으로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이니 사회개혁이니 변혁운동이니 민주화운동이니 요란히 떠들지만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신적인 것뿐이다. 곧 생식(生殖)을 통한 창조작업인, 신생아의 출생을 통한 수혈적 사회갱신이다.
인류의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악한 자일지라도 선한 자와 마찬가지로 때 묻지 않고 티 없는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 아니 나온다는 사실이야말로 생명의 신비이다. 그것은 진정 축복이요, 은총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항상 새롭고 또 그런 까닭에 신세계를 이룰 가능성이 언제나 주어지게 되는,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새롭게 명화를 그릴 수 있는 도화지를 매순간 다시금 받는 것과 같다. 그처럼 생명이란 다시 태어나면 씻은 듯이 티 없어 지는 것, 윤회사상이 인류의 가슴 속에서 솟아나 그토록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어쩌면 악마의 재생불능의 악성 그 비극성은, 인간처럼 생식을 하지 못하는데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볼 때 신생아의 탄생을 원천적으로 막으려는 낙태행위, 넓게는 산아제한 행위는 얼마나 악하고, 악마적이고 자기파멸적인가. 무엇보다 사회변혁을 거스러는 짓이고 반혁명적인 몸부림인가.
진실로 어느 사회개혁가나 혁명가보다 더 위대한 것이 어린이들이다. 생명력(vitality)이 빈약하기만 하고 메말라버려 죽음의 문화가 판을 치는 세상은 생명감에 넘치는 아이들을 통해 나날이 거듭거듭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날이 매순간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기에 그만큼 세상은 새로워지고 있다.
끝없이 재잘대고 떠들며 도체 지겨움을 모르고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 생명의 요정들이 뛰어노는 것만 같다. 세상을 엄마 품처럼 여기며 거리낌 없이 부딪고 부딪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마저 느끼게 된다. 마치 그들은 빛을 발하는 아침 햇살처럼 둘레를 따습게 한다.
때로는 환생치 않고 전혀 새롭게 만들어져 태어난 듯한 영혼을 지닌 자가 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 천성적으로 사랑의 마음을 지닌 자, 욕망이 잠들어 있는 듯한, 참으로 원죄마저 없는 듯한 그런 자, 진실로 하늘이 하늘로부터 내려 보낸 듯한 그런 자, 그런 자를 나는 가끔 본다. 특히 어린아이들 가운데서 더욱 자주 본다.
사실 사랑스럽고 귀엽고 착하고 예쁘고 티 없이 밝고도 깨끗한 아름다운 아이가 오염되지도 더렵혀지지도 괴롭힘을 받지도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이 피안에서나마 보고 싶다. 물론 살아가면서 카르마야 쌓여져 가겠지만, 전혀 새롭게 태어난 그 신선함의 아름다움은 하늘의 빛을 보는 듯 하다.
어쩌면 성인·성녀란 모두 그런 영혼들이 아니었을까.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런 영혼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면, 모두는 성인·성녀가 되지 않을까. 과거의 카르마가 없이 그런 깨끗한 눈으로 세계를 본다면 그야말로 모든 게 신천지가 아닐까. 이것은 결국 인간이란 인간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온전한 사랑을 풍족히 받는 깊은 체험을 가져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휴머니스트는 따스한 애정 속에서만 태어난다. 인류에게 크나큰 사랑을 펼친 예수나 붓다 같은 성현들은 자라날 때 얼마만한 애정의 보살핌을 입었던 것일까. 그에 반면 현대가 낳은 폭군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이들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그것은 성격의 형성발달과 같다. 사랑이 풍부하고 그것이 그에게 알차게 전달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사랑을 베푸는데도 건강한 인간이 된다. 그에 반해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사랑을 베풀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받지도 못한다. 물론 이 모든 것에도 정도와 개별적인 특성의 문제가 있을 것이니, 예를 들어 같은 여건에서도 두 아이가 전혀 다르게 성장하는 경우가 많은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께 그 환경조건이 맞았느냐 부적당했느냐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건강한 애정은 반드시 건강한 아이를 낳고 만다.
결국 이런 사실은 우리가 어린이에게 얼마나 덜 된 사랑을, 그것도 모자라게 주고 있는 것인지, 곧 인류사회에서 사랑이란 양식은 얼마나 모자라고 있는 것인지를 알게 한다.
성애(性愛)와 그리고 약간 의문시 되지만 모성애를 제외한 우정·동지애·동포애·형제애·부성애·충효·부부애 등등의 모든 사랑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터득하는 집단생활의 산물이다. 즉 사랑은 본능에서 비롯되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혈연적 사회생활을 하면서 터득되며 형성되어 품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나은 인간사회를 위한 틀이라 할 수 있는 윤리·도덕의 정제(錠劑)를 정의교육(情意敎育)이란 액체 속에 용해시켜 어린아이에게 먹이도록 하라. 즉 말로만 ‘선을 행하고 악을 범하지 말라!’고 윽박지르지 말고 그 모든 것을 그들을 품고 안아주는 사랑의 손길 속에 녹여 담아 진실된 느낌으로 전해주어라.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는 이런 신념들을 어린 시절부터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확신하고 있을 때 유토피아에 대한 가능성은 그 현실증을 띠게 되고, 그 어린아이는 건강한 유토피안으로 반드시 자라날 것이다. 그 때 이상향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지 빛의 소리 통권 제9집 수필 199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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