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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가 초원이 되는 - 정중규

정중규 2010. 1. 31. 02:40

광야가 초원이 되는

 

 

동양 최대의 ‘철새 낙원’이라던 을숙도가 언제부턴가 ‘개발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수천만 주민들의 ‘생명이 젖줄’ 낙동강을 토막 내듯 가로막아 세운 낙동강하구언을 보자.

 

그 댐의 거대한 그늘 밑에 쭈그러든 갈대 늪과 흉물스레 방치된 불법 경작지, 날개 죽지 한번 시원스레 펴 보지 못하고 또 다른 낙원을 찾아 줄지어 황급히 떠나는 새들의 처량한 모습들은 개발의 허구성과 폐단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진정 무엇을 얻기 위한 개발이며, 우린 무엇을 잃고 있는 것일까. 잃어가는 것은 새들의 안식처만이 아닌 우리 마음의 안식처, 그로 인한 심성의 황폐화이다. 파괴된 생태계를 복구하지 않는 한 우리 삶의 온전성과 생명력도 결코 회복할 수 없으리라. 인간이 지니는 욕망의 끝은 대개 물질로 화석화 되고 만다.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 같은 문명의 거대 유적에서 우리는 박제화된 인간 욕망의 바벨탑을 본다.

 

과연 물질문명의 죄악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을 우리네 삶 한 가운데에서 철저하게 끊어버린 것이다. 그건 삶의 궁극적 안식처에 대한 파괴요, 희망과 비전의 상실이었다. 그렇게 하느님과 사람 사이가 단절된 작금의 문명 현실은 땅의 황폐화 이상으로 삭막하기만 하다. 영원성에 닿지 않는 인간의 삶터 위에 영원하게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탯줄이 끊겨진 태아처럼 영원의 숨결이 떠나버린 그 곳은 죽음의 잿더미일 따름이다. ‘혼’이 사라진 채 ‘육과 물’로만 점철되어 있는 현대 물질문명, 그 번영의 불야성도 기실은 그러한 무덤에 회칠하려는 민망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순절은 그렇게 끊어진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다시금 복구시키는 때이다. 그러기에 사순절은 또 하나의 대림절. 주님을 새롭게 모시려 사십 일에 걸쳐, 가진 애를 쓰며 부활의 그날을 애타게 기다려야 한다. 그를 위해선 우선 우리는 보거나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눈과 귀를, 볼 줄 아는 눈과 들을 줄 아는 귀로 바꾸어야 한다. 하여 ‘빵과 돌’, ‘생선과 뱀’, ‘달걀과 전갈’을 구별할 수 있는 영혼의 순수함 곧 마음의 온전함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로서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사이의 깊고 넓은 간격을 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의 분열을 극복하여 혼돈됨 없이 하느님 안에서 한 마음이 되는 순결함과 무욕의 영성을 지님으로써, 자기 안에 깃든 참된 내적 역량(하느님의 은총)을 재발견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선과 악의 힘겨룸 속에서도 하느님 안에 한 마음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길은 오직 사랑뿐이다. 사랑만이 갖가지의 모든 분열과 간격을 뛰어넘을 수 있다.

 

진정 사랑의 가슴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다 품을 수 있으며 결국엔 그 모든 것보다 한 치 더 크기만 하다. 온갖 좋은 것 다 가져다 주는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온전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처지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며 사랑에 기꺼이 죽고 십자가에 온전히 자신을 못 박을 때, 거칠고 메마른 광야와 같은 우리의 삶이 기름진 초원으로 변형되면서, 춤추는 파스카의 축제 바로 그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앞에 새벽 같이 나타나시리라.

 

 

● 천주교 광안교회 회보 장대골 제96호 200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