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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장애 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 정중규

정중규 2010. 1. 31. 02:43

장애가 장애 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2002년을 ‘월드컵’이나 ‘아시안게임’ 개최년도 외에 ‘아시아·태평양 경기대회’가 부산에게 개최는 해로 기억하고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만큼 장애인문제는 관심 밖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이제껏 우리 사회가 장애인문제를 사회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통사고와 각종 안전사고나 산업재해 및 성인병의 발생, 환경오염의 문제, 신문의 사회면을 어지럽히는 갖가지 사건들에서 보듯 ‘인간환경’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는 이 사회에선 누구나 언제든지 장애를 입을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장애인 중 90% 이상이 후천적 요인으로 장애를 입었다는 통계자료만 보더라도 장애발생은 이미 일상적인 것이 되었으니, 결국 모두 ‘예비장애인’이라 할 수 있다. 참으로 장애인의 문제는 더 이상 소수의 장애인 ‘그들’만의 것이 아닌 모두 관심을 갖고 껴안아야 할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UN의 발표에 의하면 인구의 10%는 장애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거리의 사람 가운데 열 명의 한 명은 장애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거리에서 장애인을 만나기란 어렵기만 하다. 왜 그런가. 우선 우리의 도시의 거리 자체가 장애인이 마음 놓고 다니도록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만, 그보단 장애인들이 사회와 어울려 살기가 모든 면으로 힘들어 사회 속으로 들어오기 어려우니 아예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인구의 10%가 장애인이라면, 학교 학생들의 10%가 장애인이어야 하고, 공무원이나 기업체 사원의 10%도 장애인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0%는커녕 몇 %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인구의 10%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만큼 교육받지 못하고 직장을 갖지 못한 장애인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렇게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현실에서 장애인 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뿐이다.

 

사회는 공동체의 일원인 장애인들에게 그에 합당한 10%의 영역을 확보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혜택’을 바라기보다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온갖 ‘특별한 차별’을 없이함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찾으려는 주장인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장애인 먼저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먼저’보다 더 시급한 것이 ‘함께’라고 여겨진다. 결국 편견을 초래하고 마는 ‘특별한 혜택’보다 차라리 사회 속에서의 갖가지 ‘특별한 차별’을 우선 없이하라는 것이다. 장애인이 사회 속에서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스스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사회복지가 이루어져 있다면 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대우나 ‘특별법’도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장애라는 말 자체가 환경과 관련하여 정의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예를 들어 계단 없는 시설, 리프트가 설치된 지하철, 장애인이 능력껏 일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이 갖춰진 직장, 장애인과 일반인을 차별하지 않아 장애인이 장애를 느끼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 속에서 장애인은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닌 것이다. 진정 장애인은 환경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곧 환경적 장애를 무수히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장애인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이 사회가 바로 한 인간을 장애인으로 ‘낙인’ 찍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치료나 재활훈련으로 모든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장애는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한다. 마치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장애는 하나의 ‘개성’으로 파악되어져야 한다. 획일화된 잣대로 장애를 ‘모자람’으로 쉽게 판단하는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다름’의 고유한 삶으로 받아들이는 깨어 있는 인식이 특히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보화 시대에선 요구된다.

 

때론 장애인들의 이른바 ‘성공(?) 수기’를 읽으며 놀라는 것은 장애극복과 재활을 위해 쏟는 노력이 가히 ‘초인적’이라는 사실이다. 사회 전체가 장애인으로 하여금 그러한 인간승리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도록 몰아가고 심리적으로 압박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슈퍼맨이 되어야만 비소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라면 결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거기에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의지를 불태우며 쟁취한 삶의 내용이란 일반인들이 너무나 당연히 누리는 그 수준조차도 못되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그러한 유인책은 그릇되고, 거기엔 사회구조적 모순을 개인 차원이 문제로만 여기려 드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다. 장애인 문제는 당사자만이 극복해서 될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다. 장애인들이 슈퍼맨이 되지 않고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아니 최소한 그런 삶을 꾸려 나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 사회야말로 올바르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문제는 ‘약자’의 문제이다. 장애인 문제가 안고 있는 기본적 틀은, 빈부격차·노인문제·인종차별·성차별·지구생태계의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인식의 틀’과 놀랍도록 동일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경제적 이권을 손에 쥔 기득권자들이 약자와 더불어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누가 이 사회를 서로가 서로를 밀쳐내는 ‘팔꿈치 사회’라고 표현했지만 이처럼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삶의 공동체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는 아주 현실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곧 남을 살림으로서 자신도 살리는 상호부조인 보험의 원리이다. 보험이란 누가 피보험자가 될지 아무도 모르나 누구라도 피보험자가 될 수도 있는 그러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각자 적립해두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당장 혜택을 입는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 대한 준비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 사회도 이른바 정보화 시대로 넘어가면서 토지거래나 금융거래와 같은 것이 모두 전산자료화 되는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사실 사회 전체가 돌아가는 구조가 확실히 파악되지 않았을 때는 내 개인의 잘못이 남과 사회에 얼마만큼 악영향을 미치는지 잘 몰랐기에, “나 하나쯤이야.” 하며 우리는 스스럼없이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질렀었다. 오히려 혼자서만 잘 살아보겠다고 둘레의 사람들을 팔꿈치로 밀쳐 내면서까지 바둥거렸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러한 이기주의의 폐단을 뼈저리게 느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수치적으로 잡히고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싱크대에서 버리는 음식쓰레기는 결국 지하수를 오염시켜 내가 마시는 식수를 오염시킨다. 내가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교통질서 전체가 허물어져 소통속도가 지체되면서 결국 나도 빨리 갈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하면 나만이라도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선진사회의 시민의식은 이런 식으로 지극히 ‘영리한’ 현실적 차원에서 비롯되고 있다. 성숙된 자는 자신이 펼치는 행동이 결국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로 되돌아옴을 아는 눈을 지녔기에, 설사 도덕군자나 양심에 호소하지 않더라도 그냥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회 전체의 이로움’을 추구한다.

 

이제 ‘나 하나쯤이야.’ 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나 하나로부터’라는 자세로 사회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솔선하는 그런 가치관을 세워야 한다. 새 시대는 새 인간이 만들고, 그것은 새로운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가 함께 파멸을 맛볼 독점과 독식의 ‘벽의 구조’를 모두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랑과 나눔의 ‘장의 구조’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정의는 내 몫만 챙기는 이기적인 차가운 것이 아니라 남의 몫을 먼저 찾아주는 이타적인 뜨거운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회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약자에 대한 배려가 마련되어 있는 사회, 가난한 이들과의 진정한 나눔이 생활화 되는 사회, 삶의 전반에 공동선을 추구하는 선진사회 의식이 뿌리내린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사실 가장 목마른 자가 해갈되어야만 모두 진정 목마르지 않을 것이고, 가장 배고픈 자에게 빵 조각이 돌아갈 때 모두 배부를 것이며, 가장 고통 받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었을 때 모두 슬픔에서 온전히 해방될 것이다. 참된 복지는 설사 자선의 손길에 의한 ‘주는 자’가 비록 없을지라도 각자가 자신의 몫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제도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익명의 돕는 자’가 되는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그 길을 제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세상을 위하고 남과 더불어 삶은 심리적 만족감과 자긍심 차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 누가 말했던가. 네 잎 클로버는 분명 장애를 가진 클로버이지만 오히려 ‘행운의 네 잎 클로버’라고 부른다고.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 대해 그러한 근본적인 인식전환을 하면서 누구에게라도 동등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을 지닌다면 장애인들의 삶도 활짝 피어날 수 있으리라. 진정 장애인복지는 인류 최후의 복지과제로서, 우리 사회의 선진화의 핵심에 닿는 문제이다. 바로 2002년이 그 선진화의 신년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천주교 부산교구 청년사목부 제4차 청년복음화학교 교재 2000/4/8